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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책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후기 - 강신주 저

by monozuki 2025.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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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예전에 신간도서를 검색하다가 

제목이 넘 마음에 들어 찜해둔 책이다.
그리고, 이 무더운 여름에 읽기엔 

다소 헤비한 느낌이 들수도 있겠지만
가장 좋은 피서는 독서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나갔다.
평소에 잘 접하지않아 낯설게만 느껴지는 '시'와 

단어만 들어도 뭔가 어렵고 골치아플 것만 같은 '철학'을
접목한 컨셉이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렵지 않을까했는데 우려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아 진도가 잘 나간 편이다.
난이도로 따지자면 중반때까지는 비교적 잘 넘어가고 

이후에 군데군데 어려운 부분이 도로방지턱처럼
탁탁 걸리게 하긴 했다.

 


이 책은 총 21파트로 나눠져있고 

각 파트마다 21명의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그 시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하게끔
구성된 작품이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하나같이 모두 좋은 작품들이라 

내가 왜 지금껏 이런 시 또는 시인을 몰랐을까?
하는 깨달음도 전해주고 

몰랐던 시인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곁들여져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여기에 실린 시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시인의 다른 시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또, 자칫 어려울수도 있는 철학에 대해 

저자가 만나서 대화나누듯 찬찬히, 

쉽게 풀어서 얘기하고 있어
가독성도 좋은 편이었다.
이 책의 매력은 감성과 이성(논리)을 

둘다 자극시켜준다는 데에 있다.
시를 통해 잠든 감성을 깨워주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논리적 사고를 돕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더불어 철학적 이론이라든가 철학상식을 익힌다기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수 있다는게 좋다라는 의미다.


책속으로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이성복
...이것은 우리의 고통이 그저 우리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자각할 때만, 

시인의 표현처럼 나의 고통은 

오직 나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인정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한계너머의 타자와도 

관계를 맺을수 있지 않을까요?


 [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시집이나 철학책은 다른 장르의 글들보다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에는 주관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이, 

그리고 철학책에는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용어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시집과 철학책을 멀리 하는 진정한 이유는 

시나 철학에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나 철학이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느낀 것은 기존의 말로는 표현될수없는 

낯선 상처 혹은 어떤 감각입니다.
시는 기존의 말로는 말할수 없는 것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킵니다. 

이때문에 시가 어려운 겁니다.
새로운 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말을 강제했던 시인의 낯선 감각도 

공감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니 말이지요.
...반면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문법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시는 주관적인 것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시인이 들어갔던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시인이 느꼈던 낯선 물고기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테니까요.
반면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가 만든 특정한 그물을 물속에 던지면 

그것에 딱 어울리는 특정한 물고기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모두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 뇌과학의 현대이론이 타당하다면 

시는 정서와, 철학은 사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겁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특정한 타자와 마주쳤을때 기쁨을 느낄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타자와 마주쳤을때 슬픔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기쁨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의지, 

즉 코나투스가 증진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면,
반면 슬픔은 코나투스가 위축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사실 단순합니다.
동일한 어어라도 사용되는 맥락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그래서 한가지 의미만을 고집한다면
우리 삶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소리의 뼈'가 보이나요?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때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다양한 규칙들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르고 있지만,
그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언어의 규칙이란 

마치 척추동물에게 몸의 뼈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수있지요.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수 있는 능력'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근대 이후 인간 사회는 거대한 전체와 

미세한 조직들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순간 바로 우리가 속한 거대한 전체는
언제든지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괴물로 

손쉽게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한다는 생각은 

사랑에 대한 기만일수도 있다는 것.


 아렌트는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할때 

악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물은 일체의 매개가 없이 직접 무엇인가와 부딪히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다.
무엇인가와 마주칠때 물이 소리를 내듯이 

우리의 마음도 무언가에 부딪힐때 소리를 내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떤 사람을 

다르거나 낯설게 바라보게 될까요?
아마도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때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낄수 있을 겁니다.
사랑의 신비는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도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점차 알게 되는 것이니까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라야,

리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이 나자신과는 

너무나 다르고 낯설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랑에 빠진 우리는 기묘한 비대칭 상태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여기서의 비대칭은 자신의 욕망과 느낌은 나름대로 알고 있지만, 

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감정상태는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요.
이 때문인지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을 무한정 기다린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떨때 행복을 느끼는지 알려면 

우리는 기다릴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기억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미래도 기대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물론 현재도 기억과 기대에 물들어 있는 

지각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지요.


 사랑의 기적은 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데 있다.
많은 시인들이 사랑이란 

자신의 상상을 부여잡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참다운 자기긍정이란 

오직 자신의 단독적인 삶에 대한 긍정,
그리고 다른 삶을 꿈꿀수 있는 자유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수 있다.(생략)]
-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니체가 이야기한 망각이란 

불행한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인 힘,
어둡고 우울한 정서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손놓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과거의 불운한 감정과 상처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 

혹은 어떤 해석이 우리가 가진 힘에의 의지,
즉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나투스를 증진시킬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킬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낼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먼저 기존에 가졌던 관점이나 

해석을 극복할 필요가 있겠지요.
모래성을 새롭게 쌓기 위해선 기존의 모래성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 태어나고 싶지 않은가요?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자신의 코나투스가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삶이 슬프고 우울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관점이나 해석이 어떤 것인지를,
자신이 과연 낙타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성찰해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사자와 같은 정신으로 

그것을 전복시킬 기회를 포착해야 하겠지요.


 사랑이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고독한 독백의 세계를 벗어나서 불안하지만 

풍요로운 대화의 세계로 뛰어드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란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타자를 알아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타자를 알아간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맹목적인 비약을 통해서만 

타자를 조금씩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 타자를 알아가는 과정은 

사랑에 빠진 두사람의 상이한 삶의 규칙이 

제3의 삶의 규칙으로 새롭게 연결되는 

과정이라고도 볼수 있지요.
그렇지만 사랑의 완성에도 불행히 

사랑의 비극이 조금씩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두사람이 새로운 삶의 규칙을 공유하게 되었을때,
이것은 두사람이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을때 

그사람도 반드시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사랑이 가지는 불확실성, 설렘, 

두근거림같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겠지요.
마치 음식을 주문하면 

곧바로 시킨 음식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나의 사랑이 타자의 사랑을 

강제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타자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극 앞에서 우리가 '자유'의 문제를 숙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때 우리는 그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요.


 [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져야만 한다.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
-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상대방이 현재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의 자유로부터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를 버리는 것도 역시 

그의 자유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매우 역설적이지 않나요?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불가능한 소망 이면에는,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우리의 불길한 직감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 말입니다.


 철학자와 시인의 절망이란 

진정한 절망이라고 말할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절망은 침묵할때 진정한 절망일수 있기 때문이지요.
절망을 시로 혹은 철학으로 표현할때 

그것은 오히려 희망의 계기로 반전되는 법입니다.
마치 냉정한 진단만이 고질적인 병을 

치료할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말이지요.


 시가 주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친근한 사건이나 사물을 낯설게 만들면서
우리의 감성을 되살아나게 만든다는데 있다.
...쓰러질 때에만 우리는 서있음의 경이로움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 있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사람보다는 자신이 

더 오래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생기는 모든 외로움과 고통을 

자기 혼자 짊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시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상시에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강한 느낌을 의식한 적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죽음에 직면하지 않고는 삶을 제대로 느낄수 없는 법이니까요.
죽음은 곧 삶과 직면해 있다는 역설이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지요.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고독에 빠지는 겁니다.
내 마음을 그 혹은 그녀에게 주었는데 

그가 이것을 거부할때 

나는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고독을 느낍니다.
결국 고독이란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의 사랑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볼수 있지요.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 정현종의 <섬>
...시인은 사랑에 빠진 우리가 할수있는 최선의 일이란
단지 타자에게 수줍게 손을 내밀거나 

말을 건네는 것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인에게 '섬'이란 

떨리는 말을 건네는 것을 의미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만약 수줍은 나의 말을 받아 준다면 행복해지겠지만,
그렇지않고 응답이 없거나 무시당한다면 

우리는 고독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꿈꾸어 온 '하나'라는 이상은 

사실 사랑의 종말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사람들이 모두 혹은 두 사람중 한명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나가 될수있다는 전제를
함축하는 말이니까요.
만약 글자 그대로 하나가 되어 버린다면 

질투는 생기지 않을 것이고, 

마침내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감정이 찾아올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순간은 우리의 가슴속 사랑이 

자신의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성적욕망과 질투를 배제한다면 

사랑이란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키스나 애무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잠시라도 

내 손 끝에 두려는 의지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투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대방이 언제든 나에게서 떠날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사랑은 기존에 속한 일반적 관계에서 벗어나 

오직 '둘'만 서로 마주보도록 하는 강력한 사건이니까 말이지요.
이처럼 사랑에 빠질때 '둘'은 '둘'의 마주봄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며
'둘'만의 경험을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라는 바디우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지요.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은 아니다." - 황지우


 박동환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와 마주치면서
삶을 영위하고, 마침내는 미지의 세계로 

소멸되어 갈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기호 [ ]는 

바로 이 미지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어쩌면 오늘도 우리는 미지의 세계 [ ]를 더듬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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