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하게 되었다.
소설 <구의 증명>은
내용은 신파지만 신파스럽지 않게 그렸다.
이해가 되는 작가의 필력이 있다.
작가가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촘촘해서 반박할 수가 없다.
내 마음대로 해석
문장의 제일 윗 부분에 ○과 ●가 나온다. 책을 읽다 보면 눈치채겠지만 각각 구와 담이의 입장을 그렸다. 이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친구였던 구와 담이의 사랑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로 누구 한 사람의 시점에서만 그린게 아닌, 서로의 입장이 번갈아가며 나와 두 사람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담이는 구가 죽고 그의 몸을 먹는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전개되지만 이상하게 설득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보면 저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도 있겠다는 이해의 마음도 조금 들고... 내가 살아있고 나는 구를 먹었으므로 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구를 먹은 내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나도 좋고 구가 죽은 것인 걸까?! 구와 담이는 함께 있을 때보다 노마의 죽음을 계기로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했음을 깨닫게 된다.
구가 죽음 = 구가 없음
과거에 존재가 있었으면
있었다는것이므로
있었다는 것의 증명은
없으니깐 있었다고 하는 것.
따라서, 아예 없는 존재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구가 있었다는 증명을 해야
담이가 구를 사랑했었다는 것도
사실이 되니깐.
그래서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담이는 구를 먹은 것이 아닐까.
그것도 내가 사랑했던 모습에 가까울 때 먹고
담이가 할 수 있는 건
먹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구가 죽었다고 해서
화장이나 매장도 쉽지 않았을 테니깐.
사회적으로 돈이 없고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그렇게 고통당하고...
결국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 세상
그런 세상이 식인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최진영 작가는 하려고 한 것 아닐까.
공장에서 일하며 알게 된 아이인 노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던 구와 담이의 정신적 충격과 죄책감은 상당했으리라.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상황을 받아 들일수 없어 부정하려들 때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안 좋은 일을 같이 겪었을 때 서로가 서로의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아픈 상처가 떠올라 회피하게 되기도 한다.
인상 깊은 구절 & 명대사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에
고여있는 가로등 불빛을 봤다.
눈을 감기 전까지 그것을 보았다.
저거 되게 따뜻해 보이네.
그런 생각을 했다.
담이는 저기로 오겠네.
그런 생각을 했다.
...... 저거 꼭 담이네.
-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알아봤자 생각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삶을 아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 누나는 내가 참고 있는 것들을 물음표의 꼬챙이로 거듭 낚았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조차 참고 살았다. 그 질문이 불러오는 온갖 감정을 참고 살았다.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울 때에도 딱딱한 돈 무덤에 걸려 넘어졌다.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네가 아직 세상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건 아니고, 그건 힘들고, 그건 말이 안 되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대부분의 문장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끝났다.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가끔 소주를 권했다. 그 술을 받아 마신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수긍의 악수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내게 넘기는 짐을 잘 받겠다는 악수. 당신을 이해한다는 악수.(중략)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말이 같은 뜻은 아니었기에,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지만 이해하지도 않는 선,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저 기왓장에 소원을 써야 한다면
어떤 문장을 쓰겠느냐고.
곰곰 생각하던 구가 대답했다.
.....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나는 구의 말을 마음으로 따라 했다.
구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안된다면 이번 생은
빨리 감기로 돌려주세요.
그럼 빨리 죽잖아.
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 아주 작은 불행만 닥쳐도 구를 떠나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테고, 조금이라도 행복할 때면 구가 생각나 그 행복을 모른척하려고 할 것이었다. 불행해도 행복해도 구를 생각할 텐데,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구를 생각하면서 살기는 싫었다. 구와 같이 살고 싶었다.
...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다시 구를 기다리며 살 자신이 없었다.
- 구는 나에게 노마의 꿈을 나눠주었다.
만약에 우리 애가 생긴다면
우린 절대 물려주지 말자.
빚?
빚이든 돈이든 뭐든 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다 해주고,
그러고는 아무것도 물려주지 말자.
그래. 좋아. 그러자.
나는 산뜻하게 동의했다.
- 노마는 왜 죽었을까.
이모는.
구는 왜 죽었나.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잘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 저자
- 최진영
- 출판
- 은행나무
- 출판일
- 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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