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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책들

우리가 보낸 순간: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시 - 김연수

by monozuki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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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시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편과는 달리

이번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시> 편은

그닥 재미가 없었던 거 같다.
아마도 김연수 작가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를 읽는 행위의 무용함때문이리라.
소설과 달리 시는 함축적인 문학이다보니 

조금만 읽어봐도 그 호불호가 명확해진다.
그리고, 시는 소설보다

더욱 주관적인 문학이라 그런듯도 하다.
그래서 여기에 실린 시보다는 

작가의 멘트를 더 재미있게 읽었고
작가의 그 섬세한 감수성에 

다시금 놀라며 읽었던 작품이다.


이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시 3편을 싣는다.
<사랑은> <슬프고 외로우면 말해>는 

시구절이 참 좋았고,
<멸치의 아이러니>는 

참 재밌고 기발한 시라 인상적이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내일은 모르겠고,
사랑한다면
지금을 좀 더 즐기는 게 좋겠어요.
지금 제일 좋은데, 
내일 따위야 알게 뭔가요?
... 지금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 무슨 사랑이 있을까나.

 

이제 누군가 앞에 있다면,
그 사람의 얼굴이나 직업이나 
재산 같은 걸 생각하지 마시고

그 몸 안에서 흐르고 있을 피를 상상해 보세요.
하루에만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뜨겁고 힘찬 피와 그 붉음을.
사랑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죠.
우리가 서로에게 
하찮아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우린 저마다 대단해요.
아니, 우리라기보다는 우리의 피는,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듯, 
우리 모두는 사랑받아 마땅해요.

사랑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석 같은 것이죠.

아직 못 찾았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지구와 태양을 상상하세요.
그리고 피를 상상하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을 찾아보세요.

 

예술이란 모두 시간예술이에요.
오랜 시간 공들이면 
무조건 예술이 됩니다.

...예컨대 매일 같은 하늘을 찍는다면 
그것도 어엿한 예술입니다.

... 이런 것도 예술이 되는 까닭은 
모든 가을은 우리에게 단 한 번뿐이니까.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을테니까. 
매일 하늘을 사진으로 찍거나

웃음을 기록한 사람은 
당신 하나뿐일테니까.

 

 

 

 

 

 

우리가 허망한 말들, 가벼운 말들,
거짓된 말들을 더 잘 듣는 건

그것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도 
들리는 소리들이기 때문이죠.

... 우리에게 중요한 말들은 
그렇게 크게, 또렷하게 들리지 않지요.

귀를 기울여야만 하지요.
새벽의 강변에 나가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사람이라면 알겠죠.

귀를 기울인다는 건, 
온몸으로 듣는다는 뜻이라는 걸.

침묵 속에는 침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러고 보니 언젠가 내가 들은 
강의 낮은 음성에는 이런 게 있었습니다.

'어떤 강도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시를 읽는 즐거움 역시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다른 이유 없이 오직 그 언어만을 
순수하게 소비한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훨씬 탐욕적인 독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슬프고 외로우면 말해, 내가 웃겨 줄게
- 신현림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

- 딸 서윤이 일기

너를 안으면
다시 인생을 사는 느낌이다.

네 눈빛 어두운 내 안의 우물을 비추고
네 손길 스치는 것마다 
향기로운 구절초를 드리우고

네 입술 내 뺨에 닿으면 
와인 마시듯 조용히 취해 간다.

네 목소리 내 살아온 세월 뒤흔들고
생생한 기운 퍼뜨릴 때

고향집 담장 위를 달리던 
푸른 도마뱀이 어른거리고

달큰한 사과 냄새, 앞마당 흰 백합,
소금처럼 흩날리는
흰 아카시아 꽃잎 눈이 멀도록 아름다워
아아아, 소리치며 아무 걱정 없던
추억의 시간이 돌아와 메아리친다.

 

멸치의 아이러니
- 진은영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 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하나 골라내곤 했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 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는 것


(중략)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고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편

 

우리가 보낸 순간: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소설 - 김연수

은김연수 작가가 '사이버 문학광장'이라는온라인 사이트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은 책이다. 거의 빠짐없이 챙겨본 터라 나는 그 글들을 다시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새삼 섬세한 감수성을

soffy1009.tistory.com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작가 김연수가 사랑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시와 문장들을 엮어낸 산문집『우리가 보낸 순간 : 시 편』. 섬세한 문체로 사랑받아온 김연수가 99편의 시를 가려 뽑고, 특유의 감성을 더한 짧은 이야기를 엮어냈다. 날마다 읽은 시 중에서 한 편 한 편을 신중하게 골라 애틋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의 이야기를 더해 시와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김연수는 시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대신 시를 읽으며 떠오른 기억, 사랑했던 날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전하여 시
저자
김연수
출판
마음산책
출판일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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