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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금시조 - 이문열 중단편선집 2

by monozuki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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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금시조 - 이문열의 중단편선집 2

저자: 이문열

출판사: 둥지 (1994)

 

사과와 다섯병정

 한 젊은이가 어린 시절 자신이 버려진채 절에서 자라 환속한 후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려고 귀향한다. 그는 고향집에 접어들면서 본 남루한 다섯명의 군인들이 풋사과를 베어먹으며 지나가는 기이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 고향집에서 자신의 친모와 상봉하고 동네어른을 통해 감춰진 자기집의 내력을 듣게된다. 다섯명의 배고픈 군인이 마을로 잠입, 사과를 먹고 그중 한명이 자신의 어머니와 관계를 맺고 그들은 인민군에게 사살된다. 집안의 우환으로 버려져야했던 자신의 속사정을 엄마를 통해 더욱 자세히 듣게된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한다. 역사가 남긴 불행의 씨앗일수도 있고 또 그렇게 비극적이었던 한 민족간의 대립보다는 관용을 통해 지난 과거를 씻김하자는 뜻이 들어있는것같다. 

 

 병화(兵火)에 그을린 귀신은 원귀가 되지못한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아직 그들이 이세상을 떠도는것은 풀지못한 한의 무게때문일게다. 그 한을 풀어드리도록해라. 하지만 그 한이 지난 시대의 눈먼 증오에서 비롯된거라면 새로운 증오로는 풀지못한다. 그 시대의 광기에서 비롯된거라도...역시 새로운 광기로는 풀수가 없을거야...

 

그리고, 우연히 펼친 책갈피에서나 지나가다 마주친 나이든 이들에게서 그 시대의 끔찍한 증언과 접하게 될때, 또는 까닭없이 잠못이루는 밤이나 주제넘게도 역사가 슬프고 한심스럽게 느껴질때 나는 생각한다. 항상 밝은 쪽에 아첨하기 잘하는 우리의 간사한 기억과 근시적인 이기와 번잡한 일상, 그리고 이 시대의 괴질인 불문(不問)과 타성같은 것들에 가려 잘 만나지지는 않지만, 그와같이 이 땅을 떠도는 것이 어찌 그들 다섯뿐이겠냐고.

 

우리가 망각한채 잊고지내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쉽게 도외시하고 지나가는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함인가? 소홀한 정신의 흐름속에 묻혀가는 우리 조상의 한맺힌 사연을 얘기함인가? 6.25세대가 아닌 나로서는 이해하기힘든 얘기다. 

 

방황하는 넋

먼 친척뻘인 종갑의 기행과 친척들의 배척속에서 그를 지켜봐온 화자가 그와 친하게되어 듣게된 '옥선'이란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가야금, 창, 춤 등 조선조의 기생에 다름아닌 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에 화자 역시 감복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다만 종갑의 바램이었지 그녀는 결코 지조있고 진정한 풍류를 아는 여자는 아니었다는 허탈한 얘길 전해듣고 종갑의 죽음과 그러한 방황에 대해 생각해보게된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종갑씨가 그토록 열렬히 찾아헤맨것은 옥선이가 아니라 그녀를 통해 언뜻 접하였던 이조풍류의 잔영이 아니었을는지. 그리하여 스러져가야할것이기에 더 아름다운 그것이 아지못할 향수로 그 고독한 영혼을 일생동안 내몰았던것이나 아니었던지

 

금시조 이문열의 중단편선집
금시조

 

달팽이의 외출

40대 중년의 한 가장이 화려한(?) 외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곳곳에 산재한 여러 형태의 사람들속에 드리워진 높고 견고한 담만은 허물수도없고 그 담을 뚫고 들어가기에도 힘듦을 느끼게된다. 글을 쓰는 친구에게선 없으리라 여겼던 오늘 하루치의 '담'에 대한 가로막힘을 보상받으려했지만 가장 높고 딱딱한 막이 가로놓여있음을 알게된다. 아들 욱이에겐 이 세상에 담을 느끼게하고싶지않아 자신의 집에 놓인 담을 허물어 가로막힌걸 넘어뜨리려는 모습에서 현대사회의 단절성, 소외성 등을 비애스럽게 마무리지었다.

 

거기서 문득 형섭씨는 자신의 담을 생각해보았다. 초라하였지만 있었다. 그 하루 그가 그렇게도 열렬히 벗어나보고자했던 자신의 일상이었다. 결국 인간들은 모두가 담이라는 각자의 껍질을 지닌 한마리의 달팽이에 불과하였다...

 

아직도 우연한 의지의 일치만으로도 엷은 공통의 껍질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언제든 때가 오면 너희들도 제각기의 딱딱한 껍질속으로 머리를 움츠리고 들어앉게되리라.

 

...차마 끔찍한 소리지만, 우리들 종족의 몰락이 막연한 조짐으로서가 아니라 자명한 현실로 다가오고있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하면 우리들은 언어의 바벨탑을 쌓아온것이며, 이제 너무 높게 올라오지 않았나하는 것입니다. 현대 시단의 여러 흐름은 이제 단순한 다양성을 넘어 방언화(方言化)해가고있습니다. 결국 자신과 주위의 극소수에만 통하는 상형문자의 창조에 지나지않은것처럼 보입니다. 저 옛 바벨탑 말기의 징후지요. 본시 언어는 만인의 것이었고 우리는 그 토대위에서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시작한것입니다. 그후 축탑은 순조로워 19세기말까지만해도 다소의 방언은 생겼지만 우리들의 작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금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러운 언어의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상형문자가 무책임하게 창조되고 그것의 난해성에 기인된 혼란은 점차 격심해지고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우리들의 발전과 번성의 표지로 보고있지만 사실은 명백한 몰락의 징후에 불과합니다. 이제 문제는 시가 단순히 범속한 대중과 작별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이상 우리들 상호간의 언어조차 단절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일한 시가 이쪽 그룹에선 놀랄만큼 비범한것으로 손꼽히는데 저쪽 그룹에게는 전혀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단정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중략)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들 종족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언어를 과도하게 남용한 대가로 무너져내리는 우리의 바벨탑과 더불어 오는...

 

이 문장은 짧은 단편에서 작가의 의도를 '언어'를 통한 우회적인 의미전달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사투리'의 지역적 특수성을 감안하면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에겐 벌써 이 자체도 벽이 된다. 이러한 벽이 더욱 견고해질수록 우리는 언어의 바벨탑을 쌓아 융화되지못한채 이질적이 되어 한민족의 단결(씩이나?)마저도 저해한다는 뭐 그런 얘기가 아닐까? 우리가 마음속에 쌓아올린 굳건한 바벨탑은 종내 우리자신의 몰락을 불러일으키는...

 

그래, 욱아 너에게는 유년과 친구들, 나에게는 이웃과 자유를, 사람들은 자기의 조그만 세계를 지키기위해 담을 쌓지만 사실은 외부의 더 큰 세계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란다. 자기를 가두는 짓이며 이웃을 외롭고 슬프게하는거란다.

 

'벽뚫고 퓨처'를 외치는 어느 40대 가장의 목소리를 빌어 현대사회가 더욱 이기심에 젖어 굳어진 자신의 두꺼운 외투를 벗고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다. '달팽이'에 대한 비유와 '언어의 바벨탑'이라는 은유 또한 아주 설득력있게 다가온 단편이다.

 

폐원

먼 친척뻘로 일종의 불륜일수있는 사랑의 감정이 있었던 한 여원에서 살았던 4명의 여왕들을 통해 지나온 기사들 이야기를 비애적으로 풀어헤치고있다. 그중 작자(화자)와 마지막 4번째 여왕인 그애와의 이루어질수없었던 사랑을 추억하며 다시 만난 자리에서의 술자리를 통해 안타까움 또는 지나가버린 먼 기억속의 추억으로 간직한다는 내용이랄까. 다분히 감상적인 면도 있고 소설 '소나기'를 보는듯한 느낌도 없지않았으며 어쩜 실제 작가의 첫사랑의 승화된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지나간 사랑에 대해서 여전히 미련이 많은 쪽은 남자이고 체념적 또는 달관적이어서 이성적인 쪽은 여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추억 한자락도 끄집어내는듯한 여름밤의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금단앞에서 더욱 치열해지는 인간의 기묘한 정념이었다.
우울한대로 아름다운 인생의 삽화(揷話)였어.

 

제쳐논 노래

작가인 주인공(40대)이 자신이 한때 살았던 밀양으로 가 여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여인은 만나지못하고 두번째 행선지인 '갈릴리보육원'으로 간다. 너무 변해있고 이제는 고아원적인 일을 보는 곳이 아닌 탁아와 유치원을 겸하고있는 그곳에서 장래가 촉망되어 보람을 거두어줄 소년의 양육을 부탁한다. 하지만 과연 자신의 한사람의 운명에 개입하여 삶의 공허를 메우기위한 수단으로 삼아야하는 갈등속에서 그곳을 떠나온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랄까?

 

그를 사로잡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바로 독선과 자기 기만에 가리어져있던 부끄러움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래 사실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을 도와주어 '보람을 거두겠다'는 통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않았다...어쩌다 잘못빠져든 삶의 공허를 메우기위해 나는 몇푼의 돈으로 낯모를 소년의 운명에 개입하고자했다. 그 소년에 대한 애정이나 불우한 처지에 대한 연민은 조금도 없이, 오직 나자신만을 위해서 거룩하고 귀한 것이 있음을 부인하고 숭고한 애타(愛他)를 모독하는 일이었다.
...아아, 예술적이란 이름의 이 공허한 삶,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며보아도 본질적으로는 자기자신만을 향해있는 삶, 그 어떤 신성한 의미를 부여해보아도 결국은 이미 배고픔을 면한 자의 여가를 가꾸는데 불과한 삶.
새로 출발하기에는 너무 늦고, 떨쳐버리기에는 뼛속까지 뿌리깊은 천형(天刑).
무엇을 하나, 아, 나는 무엇을 하나...
Qui es-tu? Mais rien! (너는 뭐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지!)

- 발레리, '제쳐논 노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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