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 사라를 위한 변명
저자: 마광수
출판사: 열음사(1994)
설득력 있는 마광수의 얘기
마광수의 작품은 <열려라 참깨>에 이어 두 번째인데
즐거운 사라를 위한 변명이 얼마나 장황한가 했더니 기실 그렇지도 않았다.
이 책은 전반부엔 종국에는 '성개방'으로 흐르는 얘기가 심심찮게 많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부엔 그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시각을
마광수만의 논리 정연한 필체로 써 내려갔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가졌던 '퇴폐'작가라는 인상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런 사람이
교수, 그것도 연세대 교수까지 되었던가에 대한 미혹함을 떨칠 수 없었던 차에
그의 실체를 내 나름대로 알 수 있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또, 좀은 관념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그러한 단어의 차용에 대한 쓰임새를
내게 가르쳐주어 글쓰기나 독서의 이해에 폭을 넓혀줄 걸로 기대된다.
곳곳에 산재한 쓸만한 얘기들을 추리는데도 읽는 것에 못지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논리장치도 놀랍고 국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대한
그의 지식도 무시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찌 됐건 그의 얘기에 많이 설득되어버리고 말았다.
표현의 자유
이 책을 읽고 내가 강력히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작품이 외설, 저질, 퇴폐로 치부되어
법정시비까지 번지고 만 일은 대단한 유감으로 본다.
<북회귀선>과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판에 마광수의 책이 일종의 탄압을 받는 건
의당 부당한 처사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에게 전적인 신뢰를 가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무지의 상태에서처럼
무조건 그를 언론에 의해 매도하고 폄하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한 사람이 그러한 생각으로 그러한 글을 쓴다는 건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쉬우면서도 다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어쩜 내겐 교양서처럼 느껴졌던
이 책에 대한 '엑기스'를 이제 추려볼까 한다.
인상적인 구절들
마르크스는 "한 사람의 부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1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재화라는 것은 일정한 양으로 한정돼 있게 마련이어서,
남의 것을 탈취하지 않는 한 부자가 되기 어렵다는 식의 이론을 폈다.
이런 이론은 맬더스가 쓴 <인구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맬더스의 예언대로라면 우리는 벌써 굶어 죽어야 했다.
맬더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하여
식량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인류는 인구를 감소시켜 나가지 않는 한 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인류세계는 폭발적인 인구팽창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 그것은 범세계적으로 식량의 분배가 잘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계관을 폭넓게 키워나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칸트'식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식 방법이다.
칸트는 한평생 자기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책을 통한 간접학습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지리와 풍속을 익혀서
영국의 수도 런던의 골목길 풍경까지도 샅샅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만 살았는데도 칸트는 어쨌든 대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반면에 데카르트는 여행을 중요시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주저인 <방법서설>에서 '세계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키워나갔다고 고백하고 있다.
칸트나 데카르트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보통 사소설이라고 하면 작가가 직접 등장하는 소설로서
작가의 체험이 그대로 소재화된 소설을 가리킨다.
...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긴 하되,
작가의 체험이 그대로 투영된 소설은 아니기 때문이다.
... 내가 사소설 기법을 채택한 이유는 역시 앞서 말한 대로
독자를 그럴듯하게 속여 소설의 본질이
'그럴듯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 <광마일기>의 창작의도 가운데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소설을 통해 '가벼움의 미학'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소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거움의 미학'으로만 일관해왔다.
나는 교훈주의를 바탕에 깐 경건주의가
우리나라 현대소설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가벼운 소설'을 경시하거나 폄하하면서 '무거운 소설'만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말하자면 철학이나 종교 또는 기타 이데올로기의 개입 없이
소설을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소설이 바로 가벼운 소설이다.
...'가벼운 소설'은 또한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된다.
'무거운 소설'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가벼운 소설'은 다소 위악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거운 소설은 작가가 철학자나 사제 같은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요,
가벼운 소설은 작가가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에서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공자는 <주역>의 본문뒤에 붙인 발문 격인 <계사전>에서
"변화의 도를 아는 사람은 신이 하는 일도 알 것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 기성세대들은 애들이 자기들 젊었을 때처럼 살아주길 바랍니다.
전 그걸 근본적으로 질투심 때문이라고 봐요.
내 생각에는 그러한 힘의 논리를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강요되는 '효'의 논리가 아닌가 한다.
조선조 시대 이래로 효의 논리는 윗사람 또는 지배층에 대한 '절대복종'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과장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런 식의 논리가 모든 사디스틱한 폭력행위들을
은근히 감싸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 개인이 겉으로 드러내 주장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근원적 본성의 면에
더 천착하는 것이 나의 버릇이기...
하지만 확실히 시대는 달라져 가고 있다.
모세를 비롯하여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다 죽어버렸다.
그리고 새 세대들만이 가나안에 입성하였다.
그렇듯이 이 시대는 고난 받은 과거의 인물보다는
고난을 모르고 자라난 새로운 인물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 모든 민중들은 과거를 잊고, 고난을 잊어버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영웅적 고난의 시대는 갔다.
사람은 누구나 '관성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게 마련이다.
일단 습관화된 것은 쉽사리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포기는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습관에 순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수동적이고 마조히스틱한 생활양식에 길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능동적인 삶의 양식은 항상 결정의 주체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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