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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미완의 궁상각치우 - 매리 B. 레이 저 (1편)

by monozuki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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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미완의 궁상각치우 (1994)

원서명: The story of psuchiatry

저자: 매리 B. 레이 (Marie Beunon Ray)

역자: 이재기

장르: 논픽션 사이코 에세이

 

※주: 궁상각치우(窮想覺恥憂) - 깊이 생각할수록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깨닫게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만든 조어로 국악의 모음계인 궁상각치우(宮商角緻羽)에서 음차해온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뜻모를 제목에서 의미심장함을 발견한 놀라움만큼이나 이 책은 내게 인간정신의 실체를 쉽고도 재미있게 서술한 책이었다. 우리 정신의학의 흐름을 사소한 일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해서 풀어나간다. 특히 정신분석학의 삼총사인 칼융, 프로이트, 아들러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 세사람이 이룬 업적을 간단명료하면서도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몸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소홀하기 쉬운 '뇌', 그리고 거기서 나온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의 집요함에 다시금 감탄했고 그러한 노력이 정신의학의 놀라운 업적을 쌓는 개가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언제고 다시금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의 독서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데 한몫했음은 물론이고 심리학적, 생화학적, 내분비적, 생리학적 측면으로의 접근이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총망라화된 정신의학의 결정체였다고하면 너무 과한걸까.

 


화두(話頭)

 '작은새 한마리를 주둥이가 좁은 병에 넣어 키웠는데 새의 몸집이 너무 커져서 더이상 병안에서는 살수없게 되었다. 이제 이 새를 병에서 꺼내주어야하는데 어떻게 하면 병을 깨뜨리지않고 새를 자유롭게 놓아줄수 있겠는가?' 라는 잘 알려진 화두(話頭)가 있다.

화두란 수도승이 참선의 일념을 얻기위해 늘상 하는 생각이다. 역자는 이 화두에서 비유되고있는 새란 인간정신을 이름이요. 병이란 그 정신이 갇혀있는 일면적인 상념의 세계라고 이해하는데에서 이 글의 단서를 찾고자한다. 물론 단순한 물리적 의미로서 병을 깨뜨리지않고 그 안의 새를 자유롭게 활공케 할수있는 방법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병을 깨느냐 깨지않느냐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있지않으니말이다. 더욱이 화두는 시비(是非)의 양변을 배격한다고 하지않는가? 말하자면, 화두의 참뜻은 옳고 그름이나 있고 없음(色空) 혹은 빛과 어둠(陰陽)의 이분법적인 관점으로는 접근될수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병을 깨고 깨지않고는 이 화두의 요점을 벗어나있는 것이다.

 

좁은 병과 자유

 그러면 이제 되새겨보아야할 것은 주둥이가 좁은 병과 자유이다. 새는 허공을 날수있는 태생적인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그 자유의 자각이 결코 자연발생적이지는 않다. 무엇인가 자각의 계기가 있어야만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란 옹색함을 계기로 해서 자각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구속과 자유는 정신의 갈등하는 두 얼굴인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정신의 넓으나 넓은 자유란 그것을 끌어안고있는 세계의 좁디좁은 옹색함을 알아차림으로써 자각된다는 것이라고 말할수있지않겠는가! 이러한 역설이 또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 말하지않았던가. 갈등은 인간불치의 질병이라고!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갈등이 있기때문에 인간의 정신은 더 큰 자유로 전회될수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 갈등이 만들어내는 온갖 아픔들이 또한 있지만말이다. 삶 그 자체에는 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등을 돌리고 있는 다른 한쪽이 있다. 그러니 이 다른 한쪽이 있어야만 삶은 온전한 구(球)를 이룰수있는 것이다. 하나가 아닌 둘의 구를말이다.

여기에 기다리며 앉았었네.-아무것도 기다리지않는 가운데 선악의 저 너머, 어쩌다 밝음에 몸을 맡기고, 어쩌다 그늘에 몸을 맡겨도, 그것은 오직 놀이일뿐, 그럴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고-그리고 짜라투스트라가 내 곁을 지나갔다...

니체, 【실스 마리아】중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한쪽만에 의해 내몰리는 삶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넓디넓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옹색함을 알아차리지못하고 무한한 활공의 자유를 뽐낸다. '더 높이! 더 빨리!' 그러나 더 높이의 전지적(全智的)인 시야는 소외에 다름아니고 항상 더 빨리는 불가능하다. '절대속도란 없다. 오직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이...' 이것은 '절대'에 대한 포기라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수용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삶에는 똑같이 허기져하는 육체와 정신이라는 양면이 있음을 알고있다. 그리고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에도 건강하고 성숙한 정신이 있듯이 왜곡되고 아픈 정신이 있음도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정신의 비밀에 대한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은 아픈 정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게 된것들이다. 더욱이 스스로는 자기를 아무리 정상이라고 확인한다해도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인 왜곡이나 자기만의 강박관념 그리고 콤플렉스나 성격결함 등 이상한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에는 그 모든 선함과 그 모든 악함, 빛과 어둠, 인간됨과 짐승됨 그리고 신성과 악마성이 공존하고 있지않은가!

 

바둥거리는 새라야 알을 깨고 날수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바둥거린다. 그 알은 세계이다. 알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헤세, 【데미안】중에서

 

아브락사스는 신성만도 아니고 악마성도 아닌 신성과 악마성의 상징적인 결합이다. 그러니 이러한 갈등구조를 통해 정신의 본질에 이르는 길을 찾아냈을때 우리는 더 큰 자유와 성숙을 유희할수있을 것이며 결국에는 궁상각치우의 깨우침도 얻게될것이다...인간은 각자의 내부세계에 모든 완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완성되어있지않은 존재이다. 다만 끊임없이 무엇인가로 완성되어가는 그런 미완의 존재일뿐이다. 그러나 그 내부세계의 깊숙한 곳에 있는 거울에 허리를 굽히면 자기의 모습을 볼수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프시케(Psyche)라는 이름의 새의 운명에 대해서도말이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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