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민규
- 출판
- 예담
- 출판일
- 2009.07.20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이틀간의 휴일동안 다 읽었다.
이 책을 사놓은 건 작년 가을 무렵이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다니...헐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꼽는 작가인만큼
이번 작품도 나를 실망시키지않았다.
책의 컨셉도 독특하니 맘에 들었다.
후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쓴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가 만든 비현실적인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게
또 독자로서의 호기심인것이다.
그가 그린 세계는 비현실적일수는 있으나
그 안에 그려진 인물들의 감정과 생각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어쩌면 슬프게도 와닿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의 스무살때의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옛 시절을 떠올리게하는 80년대 향수의 정서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박민규 작가만의 비유법에 새삼 감탄하며 읽었다.
저런 비유표현을 나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었다.
또, 이전의 작품에 더해
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느껴지는 소설이라 좋았다.
특히, 단순한 전개이지만 막판에 짜임새 있고
약간의 반전틱한 이야기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외모지상주의인 현실을 꼬집는듯한
통쾌함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매번 소설을 낼 때마다
독특한 자기만의 작법을 취하는데
이번엔 남자와 여자 주인공의 대사에
색깔을 입힌 필체를 쓴다든가
단락의 끝과 시작을 독특하게 시작한다는 점으로
그의 다양한 실험정신도 신선함을 던져준다.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술술 잘 읽히면서도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해줘서
박민규의 작품은 정말 '재미있다!'
인상깊은 구절
젊음은 결국 단파 라디오와 같은 것임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 무렵의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은 흙처럼.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자신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는... 그림자로서 세상을 살아야 해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사랑은 분명 이 맥주 캔과 같은 거라고 나는 생각해. 뭔가 터져 나올 거란 걸 알면서도 자신을, 또 서로를 흔들게 되는 거지. 뭐, 어떤 면에선 좋아진 거야.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 친구에게 <흔들림>이 있었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비로소.. 그리고 바라는 거야. 끝까지 마셔주기를.. 입만 대고 내려놓거나, 그런 게 두려운 거고...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거야. 캔을 말끔히 비움으로써 우리가 맥주의 가치를 인정하듯이 말이야. 거품이 아닌 여자로서의 가치, 거품을 걷어낸 여자로서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알아?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여자일수록 가난한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더더욱 불안해 견딜 수 없이 때문이지.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고.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에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부자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불쾌했다기보다는 이상할 정도로 쓸쓸한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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