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추천으로
임선우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총 8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유령, 변종 해파리, 나무가 된 사람 등
SF적인 요소들이 들어있는 작품이었는데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단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단편영화를 보는 듯
장면들이 생생히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단편들 중
내가 재미있게 읽은 TOP 4는
<유령의 마음으로>
<빛이 나지 않아요>
<낯선 밤에 우리는>
<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이었다.
유령의 마음으로
2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남자친구를 둔 주인공 나는 어느 날 몸 안에서 나랑 똑같이 생긴 유령이 튀어나오게 되고
그 유령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정수에 대한 내 사랑이 소멸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정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정수와 헤어지기 위해서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령은 감정을 전달받는다는 게 얼마나 바쁜 일인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지금은 평온한데? 내가 말하자 유령은 고개를 저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평온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유령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유령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그 유령은 어쩌면 내 내면의 목소리, 또는 찐자아는 아니었을까. 애써 괜찮다고, 괜찮아여야만한다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내 감정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나의 분신같은 유령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
마침내 나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남친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비로소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유령을 통해 위로받지만 빵집 단골손님으로 드나들며 친구가 된 김지원은 '나'를 통해 외로움을 위로받는다.
외롭고 힘든 영혼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위로받는 따뜻한 이야기다.
빛이 나지 않아요
변종 해파리를 청소하는 해변 미화원인 구와 해파리로 변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구의 여친인 나는 서로 상반된 일을 하면서 갈등이 일어나는 내용이다. 상당히 SF적이지만 상당히 그럴듯해서 설득력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해파리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바다로 보내주는 그녀의 일에서 '존엄사'를 떠올리게 된다.
너는 내가 하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잖아.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 해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치우니까 끔찍하다고 생각하잖아.
구 인간이었을지 모를 해파리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구의 행동이 못마땅한 나도 이해가 되고 자신을 비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게 언짢은 구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김지선씨는 언제부터 김지선씨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인간에서 해파리로 넘어가는 정확한 시점은 언제일까. 얼굴이 지워지는 순간? 심장이 사라지는 순간? 아니면 뇌? 해파리로 변한 인간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찾는 것은 바보같은 일일까?
그리고 해파리로 변신하는 도중 육체는 해파리이지만 정신은 사람 그대로인 채 변신해버린 김지선을 통해 어디까지 인간으로 간주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마침내 해가 지자 바다가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해파리떼가 모여든 바다는 어둠이 깊어질수록 불을 켠듯 환하게 빛났다.
빛, 현실에서는 절대 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 거기에 있었어요. 김지선씨가 말했다.
...단 한번만이라도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만 있다면, 삶에 미련이 없을 것 같았어요.
누구에게나 어둠은 무서우니까, 자신의 어둠조차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빛에 다가서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선씨는 나에게 자신을 물밖으로 꺼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제 마지막은 수조 안이 아니었으면 해서요. 제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요.
...이 집에는 지선씨가 견뎠던 시간이 수조 안의 물처럼 고여있는듯했고, 나는 버티는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이 깊고 어두워져서,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지선씨가 봤을 빛에 대해 생각했다. 지선씨가 본 빛은 어디에서 나타난 빛이었을까. 그 빛은 지선씨가 오래전 바닷가에서 본 것처럼 환하고 아름다웠을까.
김지선은 해파리로 변했지만 빛이 나지 않았다. 삶의 미련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차마 떠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버티고 버티다 따뜻한 햇빛아래서 서서히 녹아내린다. 삶을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빛난 적이 없던 김지선은 해파리가 되어서라도 빛나고 싶었지만 정작 해파리가 되어서도 빛날 수 없었다.
여름은 물빛처럼
어느 날 주인공인 나의 집에 룸메였던 선영의 전남친이 나무가 되어 우리집 한복판을 차지하고 서있다. 이 어색하고 기묘한 동거 속에서 각기 다른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 독립영화관에서 일하는 나의 일상을 표현하는 대목은 코로나 시국을 담고 있어서 웃프면서도 재치있었다.
그리고 은색 철제 벤치들, 내 자리에 앉으면 보이는 것은 길게 이어 붙여진 벤치들이다. 그곳에서 관객들은 영화 상영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면 횃대에 앉은 비둘기들이 떠올랐다.
마음속에서 자꾸만 펄펄 눈이 내렸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어떤 기후는 그치기까지 몇 개의 계절이 걸리기도 한다.
낯선 밤에 우리는
이번 단편은 가장 현실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이 아니었을까. 난임시술로 고군분투하는 희애와 그녀의 중학교 동창인 사이비종교신자 금옥이 '마주침'에서 '만남'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현실의 삶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희애에게 금옥의 집은 하나의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금옥이 만들어주는 맛있는 음식은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낯선 관계에서 친숙한 관계로 점점 바뀌어간다.
인터넷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기계 속에서 액체는 막대가 꽂히고, 얼고, 돌아가고, 포장되었다. 금옥이 혼자가 되는 과정은 그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열여섯 살 금옥은 수군거림과 욕설, 배척의 순서를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예쁜 포장지가 싸이는 것으로 끝나는 영상에서처럼, 졸업 이후 금옥과의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밀봉되어 있었다.
희애와 금옥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너무나 잘 표현한 대목같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조용했던 금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마침내 알게 된 거야. 나에게는 원죄가 있었다는 거. 희애야, 믿음이 오면 힘든 건 힘든 게 아닌게돼.
종교를 갖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종교인 내게로서는 좀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음-그것이 비록 잘못된 믿음일지라도-을 갖게 될 때는 언제일까를 생각해 보면 위 문구가 잘 대답해 주는 듯하다.
집에 가서 자야지
조가 키우던 게코 도마뱀인 김재현을 둘러싸고 조를 도와 김재현 찾기에 나선 구 애인과 김재현을 봤다는 윗집 남자 정우, 이 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나만 속은건지(?) 모르겠으나 이 단편에는 작은 반전과 큰 반전이 있다. 그게 이 작품의 재미가 아닐까. 암튼, 알고보면 모두 이별한 세 사람은 '김재현찾기'를 하다가 친해진다. 그러나 라이어는 라이어를 알아보는 법. 그들의 우정도 이내 끝이 난다.
동면하는 남자
주경은 연극배우이지만 감독의 부탁으로 역할대행을 하게 된다. 그녀는 변온동물이 되어 경칩 때 깨워달라며 생매장해달라는 한 남자의 의뢰를 받는다. 그리고 그를 땅에 묻으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사실 이번 작품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는데 작가가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은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주경의 구 남친 정수가 동면하는 남자를 굳이 깨운 이유가 '불공평하다'는 거였다. 겨우내 춥고 힘들게 사는 우리와 달리 겨울잠자는 동면남이 꼴보기 싫었다는거다. MZ세대의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걸까...흠.
알래스카는 아니지만
이번 단편은 조금 귀여운 설정이다. 반려묘 성철이와 병철이를 죽인 들개에게 복수하기 위해 킬러가 되는 나-알고보면 나는 고양이라고 믿는-와 다른 연인이 있는 남자를 만나고 있는 타투이스트 유가 각자의 형편에 맞게 저주인형에 저주를 퍼부으며 의기투합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알래스카를 꿈꾸며 복수에 나서지만 인생은 그리 만만치 않다.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빛이 나지 않아요>와 함께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지만 짜임새있게 잘 만들었다 생각되는 단편이었다. 내가 죽어서 진짜 이승을 떠나기 전에 100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상상력에서 이 얘기는 시작된다. 취준생인 나의 유령과 아이돌 연습생의 유령이 콜드플레이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여기에 청소기로 빨려들어간 연습생 유령을 전직 역무원 유령이 구해준다. 살아생전 꿈이 없던 나, 꿈많았던 아이돌 연습생, 성실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역무원을 통해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해주는 작품같았다.
공연장에서는 아무 생각도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이, 그것도 지나치게 살아있는 것이 무서웠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작가가 왜 배경을 공연장으로 했을까를 생각해봤다. 사람들의 열정과 생동감넘치는 기운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살아있음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 공연장이 아니었을까.
나는 상상을 잘하니까. 청소기가 대답했다. 무슨 상상을 하는데? 무대에 서는 상상.
...하도 오랫동안 하다보니 나중에는 눈만 감아도 무대에 설수있게 되어서, 청소기 안에서 버티는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왜 버티는건데?...어차피 사라질텐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인거지. 청소기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가수가 되려고 지금까지 노력했는데, 버튼을 누르면 그게 다 무효가 될 거 아니야.
첫차를 보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여자가 물었다. 용기가 필요해서요. 역무원이 대답했다. 그는 생전에도 마음이 무너질 때면 첫차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조용하던 플랫폼에 약속처럼, 마법처럼, 때로는 기적처럼 첫차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고.
이 단편뿐만아니라 소설 <유령의 마음으로>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버티는 삶'에 대하여다.
김지선도, 희애와 금옥, 연습생과 역무원도 버티고 버텨낸다. 그들을 버티게 했던 힘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온 걸까를 생각해보며 이 책을 읽어도 좋을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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