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또 다른 소설인 <비둘기>(모명숙 번역)입니다. 그의 독특한 사고의 소산물인 이번 작품도 명료하면서도 현대사회를 비판, 풍자하는 얘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소설 비둘기는 나이 쉰을 넘긴 평범한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인생을 뒤흔들어놓는 비둘기 사건이 터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번역가에 따라 다른 작품 분위기
이 책을 읽고 난뒤 약간의 혼란이 있었습니다. 각기 다른 제목과 출판사와 번역자에 의해 발간된 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읽은 책은 독문과를 나온 모명숙 님이 번역한 것을 읽었기에 확실히 문장이 맛깔스러운 데가 있었고 좀 더 문학적인 고찰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반면,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이가 번역한 책은 다소 딱딱한 느낌이 조금 들었지만 문맥의 흐름과 의미를 돕고자 적절히 문단을 나워 그 흐름을 조절하려 했습니다. 역자후기에도 그는 사회전반적인 분위기에 초점을 두고 썼다고 밝혔습니다.
조나단의 삶에 날아든 비둘기 한마리
이 책은 거의 자폐증적인 생활, 결벽증적인 생활, 규칙적인 생활의 틀속에서 인간의 불신을 뼈저리게 느낀 후 사물에 더 깊은 애착과 친밀감을 느끼는 주인공 조나단이 비둘기 한 마리의 등장으로 여태까지 고수되어 왔던 자신의 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심리적으로 예리하게 터치해 나간 작품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이 지금의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갔고 이해가 빨랐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거대한 자신만의 성, 세상이 모두 변할지라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지켜질 것 같던 철옹성도 크고 작은 틈입자에 의해 변혁의 물결을 타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혜자 번역가가 말하는 비둘기
왠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은 읽고 있을 때보다 다 읽고 난 뒤 역자의 충분한 해몽뒤에라야 더 값지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은 부족한 나의 주제의식, 관점 포착이 더딘 탓일까요. 그리하여 나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전문가적인, 그리고 번역하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내용을 잘 이해했을 역자의 입을 빌어 나의 답답함을 대변하여 표현하고자 합니다.
자기 속에 파묻혀 아예 성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될것이다. 왜 이렇게 허황되게 살았는지. 운명이 왜 자기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거센 파도에 부딪힌듯 좌절감이 그를 산산히 부순다...이 소설의 주인공 조나단 노엘 역시 인간관계를 스스로 차단하고 그 틀내에서 안전하게 살다가, 어느날 자기 인생에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는 왜 자기의 두터운 성을 구축했을까?
어린 나이에 어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사라졌다.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여동생이 없었고, 안정과 내적인 평온함을 위해 한 결혼도 배신감만 남는다. 이런 충격적인 일들에서 '인간은 결코 믿을 바가 못된다'는 가르침을 얻는다. 그에 따라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파리로 떠났고, 그곳에서 인간 대신 사물, 즉 그가 기거하는 방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는 편안함을 느끼며 자기의 삶에 대해 흐뭇해하기까지 한다.
... 그러던 어느 날 침입자가 나타난다... 조나단은 절망과 내적인 파멸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고수해 온 삶의 원칙이 잘못되었음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한 인간이 겪는 단 하루동안의 내적 심리적 과정을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그의 작품에서 소외된 인간, 일탈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위적이고 조작적이며 도구화된 현대사회와 현대인, 그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에서의 원초적인 면과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주인공 조나단 노엘이 겪는 심리적 경험의 긴 과정을 현대사회에서 개인적 차원의 '통과의례'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때에 의식에 임하는 자는 상징적으로 전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전이단계에서 혹독한 시련과 심한 고통이 따르는 분리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통과의례란 죽고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 것으로 재생 또는 부활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가 유혜자의 역자 후기 중)
통과의례
나는 이 소설이 작가의 경험적 소산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미디어와의 접촉을 싫어하며 은둔생활을 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모습이 어쩌면 조나단 노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작가라는 전지전능한 힘이 있기에 그가 한수 위이고 이러한 통과의례를 작가도 거쳤을 것이다. 물론 나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지만 사회병리현상인 자폐증적 사회 속에서 문명의 이기에 의해 희생된 형태의 소외된 인물은 아니지만 자폐적 삶의 모습은 유사했습니다. 나 역시 이것이 하나의 과도기적 형태라 생각합니다.
조나단 노엘 & 타우베(비둘기)
주인공인 조나단 노엘의 이름은 조나단(Jonathan)은 히브리어로 '야훼가 주신'을 뜻하고 Jona는 '비둘기' 또는 '성서 속의 큰 물고기 뱃속에 갇힌 요나', 노엘은 프랑스어로 '크리스마스'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또, 이 책의 원제목은 Die Taube(타우베)로, 타우베는 비둘기를 뜻하는데 비둘기는 서구기독교 문화권에서는 '평화'란 의미와 함께 '구원, 희망' 그리고 '소생, 부활'이란 상징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들은
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들을 수 있다.
소멸된 삶, 곤궁한 삶을
위대한 내적 연출법으로 묘사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그는 정말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에는
사건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폭풍처럼 다가온다.
(이 책에 대한 독일어권 내에서의 평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다른 작품
'예전에 읽었던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와대 비서실 2 - 노재현 저 서평 (1) (0) | 2023.01.13 |
---|---|
일본은 있다 - 서현섭 (0) | 2023.01.12 |
세라복을 입은 연필 -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0) | 2023.01.11 |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 -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 (0) | 2023.01.10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후기: 어른을 위한 동화 (0) | 202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