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대표작인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느낀 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 삽화가 장자크 상페의 수채화 같은 삽화가 삽입된 단편소설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 소년의 눈에 비친 이웃사람 좀머 씨의 인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특한 외모나 언론 등을 거부하며 은둔을 자처하는 그의 성격답게 책내용도 독특했습니다.
1. 기이한 이웃 좀머 씨
한 아이의 눈을 통해 보고 느끼는 기이한 사람이었던 좀머 아저씨에 대한 기억과 으레 누구나가 가졌음직한 어린 시절의 모습들이 세계 어느 애들과 별반 차이 없음을 알게 해 줍니다. 좀머 아저씨에 대한 주인공의 기억은 그의 온전한 이름을 그 누구도 알려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구불텅한 지팡이, 밀짚모자, 검은색 외투, 텅 비은듯한 배낭, 그것이 좀머 씨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큰 호수를 끼고 하루종일 걸어서 다니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하염없이, 정처 없이 걷는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일찍 나타나서 거리의 수면을 깨우고 가장 늦게 귀가한다.
억수 같은 비가 내리던 날, 그에게 사랑(?)을 베풀려든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또렷이 뱉어낸 말이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였습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단절한 채 걷기만 하는 우리의 walking man 좀머 씨.
2. 주인공 소년 이야기
주인공인 소년으로 포커스를 옮겨보면 나무타기를 즐기고 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 그만이 만든 아늑하고 편안한 아지트인 나무 위는 누구나가 어릴 때 만들어봤던 소굴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 어릴 적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하듯 우리의 주인공도 카롤리나 퀵겔만이라는 여자아이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는 용기가 없고 기적같이 만들어진 귀갓길 동행의 꿈은 혼자만의 원맨쇼로 그치고 맙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 허전함이란... 이런 아픈 기억은 경험한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몸에 맞지않게 큰 자전거 배우기와 한 번쯤 부모의 욕심에서 나온 피아노 레슨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고통으로 기억되는 건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자전거 배우기의 어설픔은 나에게 그 옛날 독학으로 자전거를 탔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엄격한 아니 히스테릭한 피아노 선생님 밑에서 눈물을 쏙 뺄 만큼 혹독하게 피아노를 배워야 했던 서러움은 이내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소년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단지 피아노 교습에 늦었다는-그것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이유로 갖가지 욕설을 들어야만 했던 순진무구한 소년에게는 세상이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질타를 받아야 하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밉기만 했을 것입니다. 소년은 자신의 아지트인 나무 위에서 떨어지려고 카운트다운까지 하고 있던 찰나, 그의 앞에 나타난 건 좀머 아저씨였습니다. 죽음을 좇아 막 세상을 떠나려던 그와 달리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걷기만 하는 좀머 씨를 보며 소년은 자신의 행동이 경솔하고 유치스럽게 느껴져서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맙니다. 나의 죽음뒤에 치러질 장례와 친지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는 건 우리가 어릴 적 한 번쯤 해봄직했던 재미나지만 끔찍한 공상이기도 합니다.
3. 좀머 씨의 죽음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한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5학년에 진학한 소년은 친구집에서 TV를 보고 돌아오다가 마지막 만남이 된 좀머 아저씨를 보게 됩니다. 점점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 단호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걷기를 계속하고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소년을 압도하면서 밀짚모자만 남긴 채 좀머 씨는 호수 속으로 잠겨듭니다. 그 후로 그의 행적이 화제가 되지만 이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힙니다.
4.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유년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을 지식이나 문명에 의한 어떠한 편견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면서 앞으로의 세상살이에 중요한 의미가 될 자연의 질서나 존재의 가치 혹은 인생의 철학 등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냉혹한 현실의 책무에 시달리고, 복잡한 논리에 얽매이고, 목표에 매달립니다. 또 스스로의 욕심에 포로가 되면서 순수함과 각자의 독창성이 빚어낸 고유의 인간성을 상실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년기의 풋풋한 추억을 머릿속에 떠 올릴 수 있게 만드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이 더욱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애원했던 좀머 씨의 소원은 분명 작가자신의 바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5. 족적은 있으나 흔적은 없는...
과연 좀머 씨의 삶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생을 죽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듯 살아가다가 결국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이승에 무수한 발자국만 찍고 다녔을 뿐, 사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애초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그는 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질서에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입니다. 지독히도 순결하고,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전생에서부터 저승까지 이어지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서' 가버린 그가, 살았지만 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좀머 씨가 나에게 던져준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라'였습니다. 살아있는 순간순간 정신과 육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참으로 살아있는 자답게 깨어서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의식의 깊숙한 자락에서 꿈틀댔습니다.
6. 어른을 위한 동화
좀머 씨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어른을 위한 동화'입니다. 세상을 등지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보여주면서 인생 또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져줍니다. 결국은 스스로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함을 넌지시 알려주는 계도적 소설일 수도 있고 세상을 왜 그렇게 살다 가는가 하는 비난 섞인 이야기도 나올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독특한 캐릭터-어쩌면 작가의 모습일 수도 있는-의 모습을 통해 좀 더 진지하고 깨어있는 삶을 살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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